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일본군의 2차 증파와 다창전 전투 === 일본군은 상하이의 중국군이 지금껏 만주, 화북, 산동 등지에서 상대했던 허약한 중국군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전투력에 놀란 마쓰이 이와네 장군은 본국에 증원요청을 보냈다. 일본군 중앙통수부는 2차 증파를 결정, 1937년 9월 7일 타이완에 주둔한 시게후지 지대를, 9월 10일 9사단, 13사단, 101사단, 야전중포병 제5여단을 본토에서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중 13사단과 101사단은 예비군들과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로 경험이 부족했고 무기도 빈약했으며 군기 이완이 심각했다. 이들이 9월 18일 도착하자 마쓰이 사령관은 중국군 방어의 중핵인 다창전 부근을 목표로, 우측에서 9사단, 3사단, 101사단을 배치하고 13사단을 예비대로 두어 10월 8일부터 쑤저우 강를 향한 총공격을 지시했다. 다창전만 점령하면 상하이에서 포위된 해군 육전대를 구출할 수 있음은 물론 쑤저우강까지 남하해 중국군 주력을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뤄뎬전에서 다창전 사이에도 역시나 매우 견고한 중국군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군은 우쑹과 뤄뎬전을 점령하면서 치러야 했던 혈투를 또 치러야 했다. 중국군은 기관총과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운용하면서 일본군에 출혈을 강요했고 잘 짜여진 방어선을 통해 일본군에게 일부 구간을 뺏겨도 순식간에 그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방어선이 뚫려도 중국군은 신속한 후퇴를 통한 전선의 재정비가 가능했기에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일에는 21집단군이 투입되어 총반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군 역시 경험 부족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밀집된 진형을 취해 일본군의 집중 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진 일본군이 화력면에서 우세하여 일본군은 느리지만 전진할 수 있었다. 전세가 교착에 빠지자 일본군은 중포 120문을 집결해 엄청난 포화를 끼얹었고 다시 4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했다. 그래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그동안 재미를 많이 본 무기인 독가스를 뿌렸다. 결국 중국군은 공세는 무리라는 것을 인정, 23일 공격부대를 철수시켰고 25일에는 다창전이 함락되었다. 중국군은 이로써 쑤저우 강 남안으로 철수했다. 이 와중인 10월 22일 영국대사 휴게센과 함께 차를 타고 상하이를 위문방문했던 쑹메이링이 일본군 항공기들의 집중공격으로 차가 전복되어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쑹메이링과 동행했던 장제스의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는 쑹메이링이 죽은 줄 알았으나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는 걸 알고 직접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다. 이때 쑹메이링이 입은 부상이 커서 쑹메이링은 몇년간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고 1943년 카이로 회담 때나 방미 시에 외국 의료진의 치료를 받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